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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_ 심리학으로 읽어보기

LIama 2019. 1. 19. 16:04

[서평]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_ 심리학으로 읽어보기

_ 알튀세르와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1. 서론


별명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별명은 그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만큼, 타인들이 그 사람에게 원하는 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 별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별명으로 인해 내 행동은 그 별명에 맞춰서 변해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개인은 타인이 원하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매슬로가 말한 욕구 단계이론에서도 나와 있듯이, 타인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나는 나보다는 타인의 눈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행동조차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못하는 개인을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답해보고자 한다. 


2. 알튀세르의 ‘호명’

소설『친절한 복희씨』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분석의 토대가 되는 알튀세르의 이론을 먼저 집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접합한 사상가이다. 그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에 대해 기계적 해석을 거부하고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알튀세르는 사회가 경제적 층위, 정치적 층위, 이데올로기적 층위의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경제적 층위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층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층위들이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린다고 본다. 


알튀세르는 이런 입장 아래에서 이데올로기에 관해 정교한 이론을 수립한다. 먼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단지 어떤 사상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생산, 재생산되는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사회적 제도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행한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을 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라는 범주를 통해 기능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기능 중, ‘호명’의 기능이 있다고 주장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개인은 자신을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주체성은 오인(misunderstanding)에 기초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상상적이고 가상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 역시 실제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가상적인 방식으로 주체가 된다.


3. 복희씨의 주체성 : 오인


소설『친절한 복희씨』에서 복희씨는 노년의 나이에 주체의 상실을 겪고 있는 ‘착한 여자’이다. 복희씨는 닭을 죽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어느 날부터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착한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복희씨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시골에서 매일 저녁마다 옷에 붙은 이를 잡아 죽이는 것을 ‘오락거리’로 생각했을 만큼 벌레를 죽이는 것을 무서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붙은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착한 여자’라는 별명은 그녀를 그 별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처음에는 그녀 자신도 그 수식어를 좋아한 것처럼 보인다. 닭을 남편이 가져오고 시어머니는 묵묵히 닭백숙을 해온다. 착한 여자의 타이틀은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대접과 칭찬을 받는 만큼 그녀 역시 착한 여자로써의 삶을 충실히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 복희씨는 착한 여자로 호명되었다. 글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착한 여자라는 주체성을 가지게 된 복희씨는 자신의 주체성에 걸맞게 살아간다. 전처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고, 싫어하는 며느리에게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남편이 중풍에 걸려 거동이 힘들어졌을 때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보살핀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말했듯, 그녀에게 주어진 그 이름은 실제 그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을 가상의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을 착한 여자라고 오인(misunderstanding)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잃어버린 진정한 그녀의 주체로써의 위치는 어디일까?


맨 처음 복희씨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 그녀는 ‘상경한 시골 여자’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의 소개로 현재 남편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복희씨는 당시 그녀 스스로를 ‘사무원’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그 집의 식모였다. 이후 그녀는 현재 남편의 아이를 가지게 되어 그의 부인이 되었고 ‘착한여자’가 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부불 가사 노동자’이다. 하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착한 여자’로 만들었고 그녀가 ‘부불 가사 노동자’로써 하는 일을 복희씨는 스스로 자신이 ‘착한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오인한 것이다. 하지만 복희씨는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후회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호명은 무의식으로 일어난다. 그녀의 갈등을 알튀세르의 논의로만 풀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부터 그녀의 내적 갈등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4. 프로이트 : 정신구조론  

프로이트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 자신의 정신 이론을 보완하는 새로운 정신이론을 발표했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이드가 가지고 있는 주요 특성으로는 이드는 무의식적인 정신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출생 직후의 모든 본능 에너지는 이드 속에 축적 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드는 쾌락의 원칙을 지향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및 도덕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이드는 외부세계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드와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조정하는 기능을 갖는 자아가 후천적으로 이드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한다.


자아는 유기체의 안정적 보전을 목적으로 하며 주요 기능으로 유기체와 외부세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정신 기관들 사이의 대립 관계를 조정한다. 자아는 인간 성격의 합리적 측면으로 이드의 욕구를 현실 상황에 맞게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작동하는 성격의 집행자다. 즉, 이드는 신체적 욕구로 인해 유발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작용하려고 하는데, 이때 자아가 이드를 일시적으로 억압하여 행동을 통제하고 반응시간을 선택하며 어떤 본능을 어떤 방법으로 만족시킬지 결정한다. 따라서 자아가 따르는 작동 원리는 현실에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현실원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자아가 이드의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오히려 반대로 이드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집행한다는 사실이다.


초자아는 삶의 목표, 양심, 금지 명령, 죄책감 등의 정신 현상을 유발하는 가능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정신활동이다. 초자아는 도덕원칙에 따라 자아에게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자아에게 명령을 내린다. 초자아의 기능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초자아의 부정적 기능으로는 자아에게 요구하는 초자아의 이상적 요구를 자아가 감당할 수 있지 못할 경우에는 자아는 초자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학적 처벌을 자기에게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복희씨의 갈등


그녀의 갈등은 남편이 중풍에 걸리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모습을 텅 비었다고 묘사하는데, 그런 남편의 모습에 불안을 느끼는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남편에 의해서 ‘착한 여자’가 되었던 그녀를 착한 여자로 대우해줄 사람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착한 여자이기 때문에 포기해야했던 많은 것들과 그동안 억눌려 있던 욕망이 조금씩 표출되어 나온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녀 방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아편 덩어리를 만지며 끊임없이 자신을 ‘착한 여자’ 안으로 밀어 넣는다. 복희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착한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녀에게 착한 여자는 자신의 주체성일 뿐만 아니라 도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즉, 착한 여자는 복희씨에게 끊임없이 착해질 것을 요구하는 ‘초자아’의 역할을 강화 하였다.


복희씨는 스스로 착한 여자가 되기 위해 행동하였고, 그것은 초자아의 입장에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성관계 속에서 쾌락을 느낄 때도 그것을 억압하였으며, 그녀의 결코 착하지 않은 내면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이는 복희씨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복희씨의 자아는 이드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어 그때마다 아편덩어리를 손에 꼭 쥔다. 그녀에게 아편은 비도덕적이며 쾌락의 원리를 추구하는 이드의 욕망을 막아주는 것 자체였다. 그녀는 아편을 잡고 그녀 스스로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동안은 아편덩어리가 훌륭하게 그 역할을 한 듯 보였다. 하지만 복희씨의 ‘비아그라’ 사건을 이후로 아편 덩어리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왜 복희씨는 ‘비아그라’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는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남편이 식욕, 성욕을 포함에서 모든 욕망이 강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복희씨는 그동안 자신의 이드를 억압하며 자아와 초자아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드를 억압하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내보인다. 어쩌면 복희씨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불쾌함보다 부러움을 더 느꼈을지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은 중풍에 걸린 이후에도 자신의 쾌락을 끊임없이 충족해줄 것을 요구하고 급기야는 약국에 ‘비아그라’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억눌린 이드가 그 순간 꿈틀거림을 느꼈다. 거기에는 남편의 쾌락의 원리에 의거한 행동뿐 아니라, 착한 그녀가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약사의 ‘경멸어린’ 눈빛 역시 촉매가 됐을 것이다. 결국 복희씨는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훌륭한 초자아는 결코 그녀가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드에 의해 추동된 살인의 욕구는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 집에서 돌아온 그녀는 소량만 있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아편 덩어리를 보며 갈등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아편 덩어리를 한강에 던져버린다.


그녀가 아편을 한강에 던져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아편을 한강에 던지면서 생애 다시는 느낄 수 없을 최고의 쾌락을 맞본다. 복희씨에게 아편은 이드와 초자아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 이드의 욕구를 억제하는 - 역할을 했다. 따라서 아편의 제거는 그녀가 더 이상 이드를 억압하고만은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봐야할 점은 아편이 그녀의 이드가 원하던 남편의 살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도구였다는 점이다. 즉, 그녀는 이드와 초자아 간의 갈등을 더 이상 이드를 억압함으로써 해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남편의 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편을 제거함으로서 드러낸 것이다. 이는 여전의 그녀의 행동이 도덕적인 선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초자아로부터 완벽히 해방되지도, 이드를 완벽히 실현시키지도 못하는 것이다. 


6. 결론


『친절한 복희씨』에서 복희씨는 착한 여자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야 했다. 착한 그녀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을 착한 여자로 대해주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남편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그런 마음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마다 아편 덩어리를 만지며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복희씨는 거의 반평생을 착한 여자라는 오인에 기초한 주체의식 속에서 살아갔다. 그녀의 행동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초자아였다. 착한여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을 무의식의 기저로 밀어 넣으려 했으나 결국 비아그라 사건과 함께 실패하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아편 덩어리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편 덩어리마저 남편을 죽일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일뿐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생철갑 속 아편 덩어리를 한강물에 던졌고, 그녀는 그와 동시에 생에 다시없을 쾌락을 느낀다. 그녀에게 아편 덩어리는 욕망을 다스리는 매개물이자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물질이기도 했다. 이제 앞으로 그녀는 욕망을 더 이상 아편에 의지하여 억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욕망을 이룰 수도 없을 것이다. 복희씨가 앞으로 행복할지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앞으로 착한 여자로서의 삶이 아닌 그녀의 삶을 살 것이고, 욕망을 통제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뿐이다.